2026년 4월, 밀라노 비아 산탄드레아의 보테가 베네타 매장. 천장에서 내려온 직조 구조물이 부드럽게 빛을 가두고 있었다. 작품 이름은 'Lightful'. 보테가 베네타가 한국 작가 이광호(Kwangho Lee)와 협업한 조명 설치 작업이다. 럭셔리 메종이 한국 작가의 손에 자기 매장의 빛을 맡겼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 디자인이 세계에서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한 장면으로 보여줬다.
조명이 아니라 시간을 짜는 일
이광호 작가는 오랫동안 '직조(weaving)'를 자기 언어로 삼아온 사람이다. 끈이나 실을 공중에 짜내려가며 면을 만들고, 그 면이 다시 공간을 만든다. 그가 만든 면 뒤로 빛이 비치면, 빛은 더 이상 켜고 끄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새어 나오는 무엇이 된다. 이번 'Lightful'에서 보테가 베네타가 가져온 것은 그들의 상징인 가죽 스트립이었다. 작가의 직조 기법과 메종의 가죽이 만나, 매일 매장을 지키는 새로운 조명 오브제가 탄생했다.
이 협업이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한국 작가가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와 일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보테가 베네타가 자기 매장의 영구 설치 작품을 외부 작가에게, 그것도 한국 작가에게 맡겼다는 점이다. 매장 조명은 매일 손님이 방문하는 공간의 분위기를 결정한다. 그 결정권을 외부에 넘긴다는 것은 곧 그 작가의 손에 자기 브랜드의 일부분을 내준다는 뜻이다.
큐레이션되는 위치에서, 큐레이션하는 위치로
오랜 시간 한국 디자인은 글로벌 시장에서 '소비하는' 위치에 있었다. 밀라노에서, 파리에서, 런던에서 만든 디자인을 한국 시장이 사고, 따라가고, 변형해서 들여왔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흐름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한국 작가의 작품이 해외 갤러리에 전시되고, 한국 디자이너가 글로벌 브랜드의 협업 파트너로 호명된다. 보테가 베네타와 이광호의 만남은 그 변화의 가장 가시적인 장면 중 하나다.
"매장 조명을 외부 작가에게 맡긴다는 것은, 작가의 손에 브랜드의 일부분을 내준다는 뜻이다."
같은 시기 보테가 베네타뿐 아니라 다른 메종들도 한국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큐레이션하고 있다. 패션 분야뿐 아니라 가구·조명·도자기 분야에서도 한국 작가의 글로벌 진출 사례가 늘고 있다. 이 흐름은 일시적 유행이라기보다, 글로벌 디자인 시장의 무게 중심이 천천히 동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다.
공간이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
매장에 들어선 사람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보통 빛이다. 어떤 빛은 사람을 환영하고, 어떤 빛은 거리를 둔다. 'Lightful'은 직조의 결을 따라 새어 나오는 부드러운 빛으로 매장을 감싼다. 그 빛 아래에서 사람은 단순히 가방을 사는 게 아니라, 한 작가의 시간이 만든 공간 안에 머무는 경험을 한다. 이런 종류의 공간 경험이 럭셔리의 새로운 정의가 되어가고 있다 — 비싼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매일 다른 시간을 만드는 곳.
편집장 코멘트
이번 협업은 한국 디자이너에게 '글로벌 진출'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현재의 작업 조건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럭셔리 메종이 한국 작가를 큐레이션한다는 것은 곧 한국 가구·조명·자재 브랜드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다. ARCHINODE는 이 양방향 흐름의 한가운데에 있다 — 글로벌이 한국으로, 한국이 글로벌로. 한 방향만 가능했던 시대는 지나갔다.